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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소식지 : 237 호

<시가 있는 창 21> 너를 건너며

뜰 앞에
잣나무가 없어도 좋은
지리산
화엄사 아래

잣나무가 있어도
그립고
없어도 그리운
너를 건넌다

거짓말은 늘
진실이고
뜰 앞에 잣나무여
세상에 술
한 잔 건넨다 
  이문영, 「뜰 앞에 잣나무」 전문

 


 


깊은 밤, 잠들지 않고 한편의 시를 써서 머리맡에 두고 흡족한 잠을 잤다. 아침 햇살 아래 그것을 다시 보니, 아하! 이것이 나였던가……. 내가 아닌, 나와는 전혀 다른 슬픈 인식의 언어들이 종이 위에 흔들리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진솔하지 못했다는 것일까. 밤새 내 인식에 잡혔던 사물을 나는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애욕이었으며, 사물과 같은 선상에 서지 못한 내 강압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결핍을 감추기 위한 집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한 겹 감각의 굳어진 표피를 뒤집어쓴 나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다. 속앓이를 하고난 밤에 푸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짓의 형상! 세상은 늘 무겁고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을 벽이었으며, 시인은 벽의 저쪽에 온전히 자신을 남겨두고, 마법사처럼 그의 거짓형상을 일으켜 그 담을 뛰어넘는다.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거짓말은 늘/진실이고> 세상이 언급하는 진실이란 모두 거짓말인 것을.


아무리 눈을 씻어도 끝내 실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 모두는 세상의 뜰에 심어진,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였던 것일까. 너는 없고……, 바람이 한번 휘몰아오더니 막무가내로 낙엽이 진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가을이 막바지에 들었다. 낙엽은 새로운 희망이다. 낙엽은 지금 <그리운 너>를 건너는 중이다.


오늘밤은 기어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하나 가슴에 새기고 싶다. 따뜻한 상처. 그 상처 때문에 시인은 살아있는 가치를 지닌다고 했던가? 시를 쓴다는 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수 있는 나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이 끝나지 않을 싸움. 내 기필코 이 싸움을 감내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박윤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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