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주(시인)
풋사과처럼 시린 햇발들이 무작정 뛰어드는데 몸 달은 산엔 열꽃처럼 산벚꽃 희희낙락하는데 편지함엔 세금고지서 잔뜩 끼었네 내 일상엔 오징어먹물구름 잔뜩 끼네 (줄임) 이제 그만 밖은 연해진 것들, 고 앙증맞은 것들 세상을 보드랍게 물들이고 있어 아직은 움추린 산자락, 산까치 한 쌍 이리저리 펴느라 분주한데 참제비 물고 온 갯내음, 볼 부운 하늘 단속곳이 금세 바람 드는데 나를 물들여봐 묽어진 내 중심을 콕 찔러 봐 연하디 연한 풀빛 꾹꾹 눌러 희미한 봄이라도 써보게
정온, <써지지 않는 봄> 부분
에취, 성급히 나온 꽃송이가 진저리를 친다. 주위를 살피더니 얼른 제 작은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다. 황사 가득한 거리. 우르르 한 떼의 여학생들이 지나간다. 화사한 표정들. 거리가 다 가볍다. 꽃이야 진저리를 치든지 말든지 황사 낀 세상의 근심 따위는 아랑곳없다. 상점들도 기지개를 켠다. 쉬이 풀리지 않는 것은 한 자세를 오래한 탓이려니, 점포 앞 세워놓은 인형들은 애꿎은 팔다리를 흔들고 있다. 봄맞이 대청소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오래된 것들에게선 특유의 냄새가 난다. 작정하고 앉아 책상 옆 쌓아놓은 작은 박스들을 뒤집는다. 우르르 쏟아지는 잡동사니들. 반가워라, 여기 있었네. 오랜 시간 찾다가 잃어버렸구나 체념한 만년필이 멀쩡하니 모습을 드러낸다. 색색의 필기류와 메모지들, 철지난 수첩들, 구형의 핸드폰들. 제각각 사연을 껴안고 앉아 있다. 봄을 맞으려면 무거운 겉옷을 벗어야 한다. 마음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버릴 건 미련 없이 버리고 보관할 것들만 다시 박스 안으로 넣는다. 언제부터인지 하루종일 문자메세지로 타인과 삶을 공유한다. 내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고요히 침잠할 때는 나를 채워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자꾸 나를 잃어가고 있다. 이 좋은 계절, 사람과의 관계도 좋지만 꽃과의 대화, 바람과의 대화를 해 볼 참이다. 봄이 오는 들판으로 나가 마음 속 서랍을 비워 볼 참이다. 반가워라, 이 마음이 아직도 여기 있었네. 봄 햇살 아래 환한 희망을 키워 볼 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