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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소식지 : 200 호

시의 풍경<19> 까치밥

 

진명주

(시인)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시며
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
칫솔 네 개
행주 네 장
때 수건 한 장
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봉지를 들고
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
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
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그늘이건 별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
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
마지막인 듯
터질 것처럼
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

               이병률, 〈희망의 수고〉 전문

 

 

 

일이 있어 옛날 살던 동네를 갔다. 간 김에 일을 마치고 단골로 가던 서점을 찾았다. 서점은 그 자리 그대로이나 벽면 한 쪽을 차지하던 문학코너 자리는 터엉 비었다. 그 자리에 아이들 참고서만 가로 길게 누워 있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아요. 서점주인은 말한다. 좌대에는 베스트셀러만 몇 권 구색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전자북이나 주문만 하면 득달같이 배달되어 오는 인터넷서점이 있는데 누가 동네 작은 서점으로 향할 것인가. 차를 마시고 나와서도 마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또 보자는, 또 오라는 말은 서로 삼켰다.


그러고 보니 서점 근처 빵집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대형 핸드폰 가게가 생겼다. 문 앞에는 돼지탈의 커다란 인형이 음악에 맞춰 쉼 없이 춤을 추고 있다. 불빛은 거리 전체를 빨아들일 듯 화려하고 밝다. 희망이란 낡은 동앗줄을 부여잡고 쉼 없이 주저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환한 불빛 아래 그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빨간 플라스틱 그릇 위에 홍시가 소복하니 담겨 있다. 기다릴 식구 하나 없는 할머니는 사람 구경삼아 늦은 시간까지 앉아계신다. 책 봉지, 홍시 봉지, 봉지봉지 손에 들고 뒤돌아본다. 호물호물 잇몸으로 웃는 할머니. 까치들에게 남겨주는 홍시 몇 알처럼 쪼그라져간다. 언젠가는 저 자리, 저 풍경도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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