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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소식지 : 273 호

[시가 있는 창] 57 갈증에 대하여

[시가 있는 창] 57  갈증에 대하여

 

마당에
녹음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줄임)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 장석남 시 「마당에 배를 매다」 전문




멀리, 아주 멀리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녁나절에는 후득후득 잎 지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걸었습니다. 떨어지는 나무의 잎들이 한 장 한 장 내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듯 몸 위로 마음 속으로 내려앉습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발에 밟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옷깃에 깊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 버려야 할 때 버리더라도, 어디 낡은 이파리 한두 장쯤 주머니에 넣어가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가을이니까요.

정박 중인 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리 하염없는가요? 머리나 옆구리쯤에 붉고 노란 불빛들을 달고 말입니다. 그 불빛, 꼭 주머니에 넣은 단풍색과 흡사합니다. 나무에 물든 단풍색이 하늘로 번지듯, 배의 불빛들은 바다 위로 번집니다.

내 마음에도 노랗고 붉은 등을 달은 배 한 척 매어 봅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배는 얼마나의 그리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비릿한 내음이 몸속으로 스며들고, 어디서 목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합니다. 하루의 시간도 그렇지만, 우리의 한 계절도 너무 쉽게 왔다가 사라집니다. 녹음 가득하던 우리의 청춘도 언제 벌써 저만치 뒷모습을 보이고, 그때 품었던 열정과 무모함은 자취가 없습니다. 밤바다에 묶여버린 배들처럼, 나는 기억 속에서만 가끔씩 출항 나팔을 불어 봅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이 두근거리는 갈증을. 다만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들썩이게 하는 어떤 힘.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세상 어디로든지 나를 끌고 달아나는 생각 하나를 떠올리며, 나는 이렇게 즐겁습니다.

박윤규



박윤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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