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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소식지 : 184 호

詩의 풍경 <3>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명주(시인)

퇴근 시간 때 전철에 올라탄
등산복차림 사내가
산철쭉꽃가지 한 묶음 들고 내 옆자리에
그냥 말없이 앉아 있다
동덕여대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꽃을 무릎에 앉힌 두 손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무거운 것들이었구나
            조정권 〈꽃잎〉 전문

 

 

오랜만입니다. 잘 계시죠? 네, 잘 있어요. 한번 봐야죠. 그래요. 한번 봐야죠. 한참 소식 끊겼던 지인의 전화를 받고도 한번 보자는 말을 남긴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는 아직도 그 ‘한번’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득달같이 나섰을 거리도 사람간의 간격도 한 마장쯤 띄워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시간은 어찌나 잘 흘러가는지요. 세상의 시간에 발맞추느라 등 뒤의 태엽만 힘껏 돌려대며 살고 있습니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타박타박 길을 나섭니다. 언덕에 올라서자 어디 숨어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바람에 겨우 지탱하던 남은 꽃들이 화라락 쏟아집니다. 꽃 지는 나무 벤치 아래 그림처럼 한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여자는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어서인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제 안의 무게를 쏟아놓을 작정을 하고 올라온 것인지 뚬벙뚬벙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나는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여자를 지켜봅니다. 여자의 머리 한쪽 올라앉은 나비 한 마리는 지구상의 어떤 무게보다 무겁게 그녀를 내리 누르고 있습니다. 슬픔이 체념에서 추억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요? 사랑의 이름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인연들. 그녀인지 나인지 나비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훅 하고 터집니다.
잘 있지요? 네, 잘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에 기웃거리던 마음이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어 버리긴 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일깨워주려는 듯 한 걸음 물러서 있는 나를 쉴새없이 불러냅니다.
바람이 꽃을 날린 빈 가지 위에 앉으려다가 무엇이 바쁜지 서둘러 떠납니다. 나비와 함께 울던 여자도 슬픔을 털고 일어섭니다. 벤치 근처에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말라 있습니다. 한 때는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웠을 저 거대한 뿌리는 제 화려한 시절의 추억만으로도 풍화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여자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언덕에는 일몰이 내리고 언덕 아래 마을에는 불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어두워가는 세상 속, 다시 사랑을 켜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볼에는 저녁놀처럼 행복이 살폿 내려앉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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