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동
주례동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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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동의 유래
주례동은 예로부터 아래쪽 큰 동네인 주례본동과 고갯길 쪽의 작은동네인 냉정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나와있고 1872년 제작한 경상도 지도에는
사상면 주례촌과 냉정촌이 나와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는 주례의 하천인 동천과 남천, 그리고 사목포 나루터가 기재되어 있다.
주례의 본 동네 앞에 물길이 합쳐지는 곳을 <냇바닥>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강물이 들어와서 나루터가 있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솔밭이라고 했으며, 주례마을의 중심지는 <골새>였고 <동녘>에도 인가가 있었다. 주례동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고갯길 중턱에 있던 <냉정>의 약수였다.
1714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 13도의 물 중에서 이름난 약수로서 냉정의 물을 꼽고 있다.
주례동 지명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사상지역에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주례는 옛날 한 마을의 농사를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농악을 울리면서 일을 해내었던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한자로 표기하여 <주례>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주례가 지형적인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으로서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로서 <두리>와 동평현에서
주례로 나와야 앞이 트인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르>를 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어인 <두레, 두루, 두리, 드르>등에서 주례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주례동은 이처럼 낙동강변에서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요지였기 때문에 냉정 산 위쪽으로 있던 성터는 학장동의 학성과 연결된 목장성인데 방어성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성터는 해방이후까지 학장동에서 냉정, 개금을 거쳐 가야공원까지 남아 있었는데 6·25때 미군이 하야리아 부대를 조성하면서 성벽의 돌을 옮겨가 버려 성터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터로 난 길을 따라 가야, 개금, 주례사람들이 냉정 뒤쪽 호랑이굴이 있었다는 오지봉의 구덕재를 넘어 대신동으로 내왕했다.
그런데 주례에 있던 사목포나루터는 가축을 취급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서 목장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주례동의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철로를 따라 구도로가 있었는데 냉정 고갯길 쪽으로 새도로가 나면서 지난날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나아가는 국도가 되었던 것이다. 옛 성터가 있던 산중턱에는 현재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이 들어서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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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