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69 호
시가 있는 창 (53) 나무의 말을 알아채다

밤에,
비를 맞고 선 나무에 다가서면
소리가 보인다
가지를 부러뜨리지도 않고 그저 톡톡 두드리는
있는 품을 다 벌리고 그 수작 받아주는
넉넉한 수평과 수직으로 교접하며
(줄임)
그게 사람을 만나고는 못 보던 소리
사람의 눈빛에 가려 소리들은 파장만 남는데
비를 맞으며 나무에 다가서면
순하디순한 천수천안千手千眼, 그 눈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는데 하나도 슬프지 않고
밤새도록 나는 그 정하게 서로 섞이거나 품는 소리
내 몸에서도 어떤 소리가 흐르며
나무와 비가 만드는 참 아름다운 음유吟遊를
어두운 눈으로 훑어보는 것이다
― 졸시, 「관음觀音」 중에서
비의 신 ‘쁘라삐룬’. 어디서 천천히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간혹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하더니 또 잠잠하기를 반복한다. 그래, 세상 모든 일이란 게 ‘불현듯’, ‘졸지에’ 일어나는 법이 없으니. 다만 사람의 욕망이나 어리석음 같은 어둠의 막이 둘러쳐져 그 ‘예고’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탓일 게다.
아파트를 들어서다 보면 층층 칸칸마다 은은한 불빛들이 정겹다. 그 각각의 불빛들은 그 안에 각각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었으리라. 좀 오래된 아파트라 제법 크게 자란 나무들이 한창 기운을 뽐내며 2층, 3층을 기웃거린다.
누가 툭툭 내 뒷어깨를 치기에 깜짝, 뒤돌아보았는데 지나는 바람만 휑하다. 아, 목덜미 쪽이 젖어오는 것이, 나뭇잎이 제 품었던 물구슬 서너 알 투둑 던졌나 보다. 위를 쳐다보니 아파트 불빛에 반짝이는 천개의 눈망울들이, 천개의 팔들이 일제히 내게로 쏠려 있다. 감사하게도!
그래, 나와 다른 상대―그게 풍경이든 사람이든―에게 마음을 열면 소리가 보이나니. 그것이 힘차게 존재하는 소리, 그 존재하는 것의 생각이 보이나니. 나는 살아오면서 내 안에 아주 오래된 아집의 성벽을 쌓은 모양이다. 내게로 오는 다른 것들의 눈빛과 생각과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그래서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아주 단편적인 모습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리라.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풍경이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얼마나 복합적이며 어마어마한 다양성을 지닌 것을.
나는 어둠과 비가, 나무가, 그리고 불빛과 바람이 만드는 지극한 풍경에 취해 있는 것이다. 지금 나도 비 맞는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팔을 들었다. 나는 빗속에서 꿈꾸며, 그리고 진화하는 중이다.

박윤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