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64 호
시가 있는 창 (48) 시도 때도 없이
사진 최민식
어느 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흔들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氷壁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두는 일.
밥아,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 이성복 시 「밥에 대하여」 전문
언제 봄이 오려나. 밤바람이 매섭게 파고든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거리는 인적이 드물다. 나는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걷는다. 그냥 걷는 것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간판의 네온이 흐물거리며 해괴한 형상을 만들어 낸다. 나도 그 어떤 해괴한 형상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 도시의 휘황한 불빛은 그래도 이 밤이 즐거운가 보다. 이 메마른 반짝임을 바라보는 나는 어쩐지 그 색색의 불빛 속에 꼭 그만큼의 슬픔을 감춘 듯하여 썩 유쾌할 수가 없다.
앙상한 겨울나무들은 제 견뎌온 아픔의 시간만큼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갔던 것 같은데 내 그림자는 온데간데없다. 내 까닭 없는 이 슬픔도 어디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흐린 기억처럼 별은 뜨지 않고 치렁한 전선줄만이 획을 긋고 있다. 아, 문득,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이 부르르 떨린다. 도시의 밤은 무척 오만하며 무언가 좀 아슬아슬하다. 어릴 때 하던 돌멩이 쌓기 놀이처럼, 어디서 ‘펑’하고 운을 떼면 저쪽에서 ‘와르르’할 것 같은……. 그래도 이렇게 아직까지 시간을 버텨주는 것이, 그 오만이 기특하고 고맙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얼까. ‘내 삶에서…’라고까지 거창하게는 말고, 그저 ‘지금, 나에게…’. 그대를 그리워하는 일? 몸을 파고드는 바람? 오늘 그 기분 꺼림칙했던 상황을 빨리 던져 버리는 일? 내일도 살아야 하니까, 살아갈 궁리를? 이 정도가 겨우 내 삶을 지탱해온 것일까? 이 정도의 행복? 이 정도의 평화를 구하러 천지사방 달려온 것인가. 그래,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누가 꽂아 두었는지, 육교 위 철제 난간에 조그만 바람개비 하나가 막 돌고 있다. 신나게 도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고, 정말 열심히는 돈다. 그러다가도 바람이 잠시 숨 고르는 사이 거짓말같이 딱 멈춰 버린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사는 일도 저런 것일까. 밤의 거리,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불빛은 더 차갑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이놈의 허기는 왜 자꾸 올라오는 것일까.

박윤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