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62 호

시가 있는 창(46) 싸락눈 향기 날 때 새봄이 온다

싸락눈 내리는 늦겨울 저녁
꽃도 병(病)도 없어
기계적으로 물 주며 잊고 살던 소심(素心)과
최근 들어서는 늘 곁에 놓아두고 두리번 찾던 시간을
(내 안경 어디 있지?)
다시 만나리.
한번 만나고 나면 세상의 온갖 선(線)들이 시들해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가벼이 살짝 쳐든 처마의 선을
받침기둥 하나와 수인사하고
서로 팔로 받치고 서 있으리.
싸락눈 맞으며.

다음엔 마음놓고 금가리.      

     ---황동규 시 「풍장 52」 전문


복수초
















사진 박준홍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에서 봄 향기가 난다. 33년 전의 기억이 깨어난다. 그때 봄 향기는 바람 소리와 함께 잿빛 내려앉은 황폐한 겨울빛을 깨워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다. 바람에 내맡긴 풍장의 초분(草墳)에도 싸락눈 향기가 스치듯 포근했다. 광야의 만나(manna)처럼 간절한 기도의 향기와 같았다.

싸락눈이 가랑잎을 스칠 때 구슬픈 소리와 만난다. 저녁 모이 찾는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슬프게 파고들 쯤, 싸락눈 맛이 궁금해진다. 만나의 맛은 아니다.

싸락눈은 겨울빛을 시샘한다. 싸락눈 흠뻑 젖은 낙엽 길 내딛는 발길, 쓸쓸함이 촉촉이 스며들어 뼈마디가 시려 온다. 겨울바람 소리에 취한 외로운 가랑잎처럼 가슴도 시려 온다. 풋풋한 젊은 향기 깊숙이 묻어 두고, 생긋이 붉게 물든 잎사귀처럼 늙음과 죽음을 아는 나이 먹었다.

싸락눈이 봄을 재촉한다. 계절은 자연의 섭리대로 갈마들기 마련. 또다시 봄이 갱신의 옷을 입을 거야. 춘란의 소심(素心)이 하양 속살을 내밀기도 전에, 노랑 미소 뿜어내며 얼굴 내미는 복수초는 인고의 꽃. 그 인고의 숭고함처럼 당당히 가슴을 펴자. 웅크리지 말자!

아직 복수초가 눈밭을 뚫지 않아 차디찬 향기는 알 수 없지만, 싸락눈 그치면 서릿발 녹는 새봄의 향기는 알 수 있을 거야. 언제나 풋풋한 젊은 향기 곁에 두고, 찬 가슴 녹이는 온기 품고서 따스한 햇살 가득한 길을 걸어가야겠다.

싸락눈에 여러 생각을 적셔 본다. 싸락눈과 함께 춤추는 빗방울은 이리저리 겨울바람 이는 대로 찰랑찰랑. 나직막한 언덕 넘어 길모퉁이에서 뒤안길 되넘어 보아도 싸락눈 흔적은 온데간데없다.

기억 속 싸락눈은 기도에 응답한다. 시린 손을 잡아주던 온기가 떠오르면, 옛 동무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다. 처마 밑 발을 동동거리며 애태우던 내 동무, 술래놀이 즐기던 터벅머리 내 동무, 고향 친구들 다 모여 웃으며 뛰어놀고 있다. 처마 밑에 홀로 서면 천진난만한 코흘리개 시절로 되넘어 갈 수 있다.

싸락눈이 추억을 깨운다. 추억을 먹고 사는 여린 마음, 추억 속에서 새싹을 틔운다. 새로운 봄, 봄바람이 업고서 걸어오고 있다.
 
싸락눈 향기 날 때 새봄이 온다.

신기용(문학평론가)



신기용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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