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61 호
시가 있는 창 (45) 아무 일 없는 듯

참 무거운 이별을 한다
슬픔은 방향도 없이 옮겨 타는 불이라서
홀로 아프지 않은 건 다행이다
세상 또 가벼운 이별이 어디 있으랴마는
하룻밤에 저리 붉어진 얼굴 좀 보아
속은 있는 대로 타서
강물은 강물대로 검게 흐르고
나무는 묵묵默默으로 고개 숙였다
기어가는 나무벌레조차 숨죽이며
함부로 소리내지 않는다
바람은 산의 어깨를 잠시 다독이고 가지만
참다 참다 그 울음 터지면
온 숲을 들썩이며 울고 가것다
----- 졸시 「가을산」 전문
가을산에 들어서면 왜 그 가을산은 보이지 않고 까맣게 탄 내 속만 보이는 건가. 오늘 한 지인知人을 떠나보냈다. 이 생이야 잠시 머무르다 가는 것이지만, 그저 기약 없는 그 헤어짐이 아프다. 한 때의 지나감이라 잊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내어야 할 일상을 만나는 일이 아프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아래 들리는 바스락 소리조차 미안한 저녁이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린다. 붉은 표정의 나뭇잎들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돌자락에 앉아 잠시 생각에 들었나 싶은데 금세 어둑해진다.
내일은 비가 올라나? 산머리가 멀어지며 아슴해지는데 별은 뜨지 않는다. 별 대신, 산 아래 사람의 집들이 하나 둘 불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오늘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살아가는 일과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굴곡이다. 어디서 불쑥 무엇이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설지 모르는 일이다. 가을이 짧듯 삶의 길도 그리 멀지 않으리라. 그래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우리는 삶의 길에 함께 매달려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언제나 과정일 뿐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은 늘 영원을 꿈꾸며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굴곡진 삶 모퉁이에 이르러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놓아주어야 하리라. 붉어진 낙엽이 머리에 무릎에 뚝뚝 떨어져도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처럼.
허적허적 어둔 산길을 짚어 내려간다. 어둠의 키큰 나무들이 나에게 눈을 부릅뜬다. 온통 머릿속이 하얗고 얼굴은 또 붉어질 대로 붉어진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늘 지나던 길이 많이 낯설다. 가야할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내 앞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 발걸음이 가볍다. 행복하게 웃고 떠들며 지나는 그들. 그들의 가슴 속에도 이 가을, 버리지 못한, 무슨 꿍꿍이처럼 속절없는 슬픔 한 움큼 숨겨둔 것일까.

박윤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