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52 호

시가 있는 창 <36> 함께 출렁이며

시가 있는 창 2월호 사진


학질이나 그런 몹쓸 병까진 아니더라도
한 열흘 된통 보란듯이 몸살이나 앓다가
아직은 섬뜩한 바람 속, 허청허청
삼천리호 자전거를 끌고
고산자 김정호처럼 꺼벅꺼벅 걸어서
길 좋은 이화령 두고 문경새재 넘어서
남행 남행 하다가
어지간히 다사로운 햇살 만나면
볕바른 양지쪽 골라 한나절
따뜻한 똥을 누고 싶네. 겨우내 참아온
불똥을 누고 싶네 큼직하게 한 무더기 보란듯이 
보란듯이 좋은 봄날


윤제림 시 「봄날은 보란듯이」 전문


                                 

그래도 봄이다.

우리 그동안 참아온 어느 해 겨울이 좀 나았을까마는, 지난 겨울은 너무 참담한 고통이었으니. 그저 절망하는 자와 인내하는 자와 외면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들 사이에서 정의와 진실은 사라져 버렸다. 애꿎은 겨울바람만이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시간.

이즈음 햇살의 촉감이 부쩍 부드러워졌다. 두 해 전 묘목을 사서 심은 홍매화가 햇살에 물든 것처럼 바알간 색을 머금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켜선 나무들은 가지마다 쌀알만한 혹은 콩알만한 움을 하나씩 보기 좋게 물고 있다. 저 깜찍하고 얄미운 생의 모습이라니.

정말 봄다운 봄이 오려는 것인가. 봄이 와서, 모든 초목과 그리고 길것, 날것들이 제 목숨의 색을 바라듯, 사람도 제 귀한 목숨의 색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겨울의 상처에 새록새록 새살이 좀 돋았으면 좋겠다.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분열이었다. 이 조그만 나라가 외세에 놀려 남북으로 나뉘어진 마당에, 정치하는 자들의 정치놀음으로 동서가 나뉘어지더니, 아직도 해묵은 이념 논쟁이 오는 봄을 더욱 애처롭게 한다. 그 생각만 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

내 별스럽게 나라의 앞날을 생각한다거나, 무슨 거창한 내 목숨의 사명감 같은 것을 말할 위인은 아니지만, 그저 새봄이 와서, 우리 사람들도 좀 평화롭게 꽃피고 화사하게 팔랑거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새들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나무처럼, 여기서 까악 저기서 까악 재미지게 화답하는 까마귀처럼, 우리도 좀 함께였으면 좋겠다.

꽁꽁 얼었던 담벼락 가의 작은 개울이 졸랑졸랑 물소리를 낸다. 며칠 만에 얼음이 풀린 모양이다. 작은 개울이 흘러가면서 지상의 아름다운 목숨들을 깨우리라. 참 어렵게도 봄이 왔으니, 우리도 서로 걸어잠궜던 마음 풀고 함께 출렁거릴 수는 없을까. 함께 덩실거리며 출렁거리며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보란듯이 좋은 봄날이니.

박윤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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