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 조용미 「자리」 전문

지진이 났을 때 울산 사는 친구는 남편과 아들에게 도움을 청해 주방과 거실의 그릇장을 잡고 있다가 도대체 이게 뭔 짓인가 싶더란다. 외국생활을 하면서 하나 둘 마음의 위안을 받으며 사 모은 그릇들이었으니, 세월 따라 그 수가 늘어 만만찮은 양도 양이지만 소중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으니 그 공포가 얼마나 컸으랴.
나 역시도 그 친구만큼이나 적잖이 그릇을 모은 터였고 지진이 났을 때 마찬가지 상황이었기에 그 친구의 기분이 십분 이해됐다. 그래 허망한 생각도 들었겠다. 애지중지 아끼던 것들이, 소중한 추억의 시간을 같이한 것들이 한순간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릴 수 있다 생각하니 그 많은 나날들이 순간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다 생각될 것인가. 무리가 아니겠다 싶었다.
즐거움이 일순 마음의 짐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카페 앞 빈 화분에는 딱 그만큼의 적요로움이 담겨져 있다. 한 때 꽃 피웠던, 한 때 푸르름이 가득했던 그 날들은 어디로 갔는가. 빈 화분은 지금 어느 기억 속을 떠돌고 있을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데, 한 때 삶의 돌파구였고 삶의 활력소였던 시간의 흔적을 도려내면 무엇이 남을까? 바글거리는 마음 속 기억들을, 울고 웃던 나날의 사연들을 들어내면 그 자리는 또 어떤 무늬가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습관처럼 너무 많은 것을 끼고 산다. 그릇장 속 그릇을 늘리듯 사소하고 부질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정갈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행복의 맛을 찾듯 또 다른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때가 되면 정리를 하며 살아야 하는데, 번다한 생각이나 마음을 분갈이 하라면 나는 내가 가진 일상의 일들 중 어떤 것을 빼고 어떤 것을 담아 정리를 해야 할까. 시간이 가도 허망함이나 원망 없이 담담하게 잘 빚어진 고요를 담아내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가을 햇살이 깊다. 나는 지금 또 어떤 자리를 남기려 이리 열심히 사는 것인가.
진명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