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42 호

시가 있는 창 26 - 다시는 안 보리라 다짐했지만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며칠 전 봄비치고 제법 많은 비가 내린 아침, 떨어져 쌓인 벚꽃잎을 즈려밟으며 출근했다. 무슨 꽃이든 꽃이 피면 마음이 등불을 켜듯 환해지지만, 꽃잎이 떨어지면 마음 아프다. 자잘한 꽃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은 꽃구름으로 둥둥 떠다닐 때와는 또 다른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도도하고 고귀한 처녀 같은 하얀 목련이 떨어질 때는 굴욕적 느낌이 들어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미련에 애걸복걸하다 누렇게 떨어지는 모양이 참 보기 싫다. 옛날부터 뜰이 있는 집에서 가꾸던 모란이 지는 모습은 또 어떤가.


우리 집에도 모란꽃나무가 있었는데, 봄이 되어 빈약한 마른 가지에서 미리 꽃봉오리를 받들고 새 잎이 올라 올 때면 언제나 마음이 설레었다. 단단하던 봉오리에서 진분홍 색깔이 조금씩 비어지던 어느 날, 햇빛을 받아 모란꽃이 활짝 열리면 온 가족이 감탄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꽃의 검붉은 빛깔과 크기에 압도당해 마치 비현실 속에 있는 듯 황홀해서 감탄하다 못해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매년, 하필이면 꼭 커다랗고 물정모르는 그 꽃이 벌어져 있을 때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를 한다. 그럴 때마다 이 큰 꽃이 비를 맞으면 어떻게 견딜까 싶어 공연히 안절부절 못하다 박쥐우산을 들고 나가 꽃 위에 씌워주곤 했었다. 그러나 며칠 못 가 그 꽃도 진다. 져야한다. 화무십일홍. 모란이 지는 모습을 보면 참담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화려한 꽃잎을 한 장 한 장 기워서 홑이불이라도 만들고 싶다. 혹 비를 피하지 못하고 모란이 비에 젖어 처져 있다가 지기라도 하면 그 참담함이 너무 가혹해 다시는 이 꽃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이담에 이사를 가면 절대 모란은 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누군가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 허무한 사람 마음과는 상관 않고 꽃이 지고나면 그뿐, 꽃 진 나무들은 다음 시간을 계속 살아가고 또 다른 꽃들이 차례로 피었다가 진다. 식물들의 개화 기간은 겨우 일주일 남짓하지만 꽃의 흔적이 없는 나머지 삼백예순날도 어떤 꽃나무란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 우리 마음도 이런저런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란 이름의 이 꽃나무는 사소한 바람에도 언제나 흔들린다.
전명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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