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40 호

시가 있는 창 24 - 꽃필 차례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전문


 


나는 가끔 ‘때’라는 것에 집중한다. 기회라는 말과는 달리, 좀은 무겁게 내 삶을 관장하여 있는가 싶기도 하다.
통도사 아는 스님 한분이 매화 꽃핀 소식을 알려왔다. 내 조그마한 작업실을 금정산성에 둔 터라, 이곳의 기온은 적어도 아랫동네보다 3도 정도는 낮다. 지난겨울은 나에게 혹독한 추위였고 봄은 그만큼 느린 걸음으로 온다.
 지난 해, 작업실 마당 한 귀퉁이에 청매 홍매 한 그루씩을 사다 심었는데 그것들이 겨우내 아무 기척이 없어 물도 주지 않고 방치했던 터였는데, 스님 전화를 받고 혹시나 해서 가보았더니 쌀알만한 몽오리가 여럿 맺혔다. 요 며칠 비 내리고 금정산에 온통 안개 자욱하더니 그 작은 것들이 제법 통실통실 살이 올랐다. 이제 한두 달이면 이곳 주변은 온통 꽃천지일 게다. 매화는 왜 굳이 이 시린 때를 잡아 꽃 피우려는 것일까.
자기만의 때――.
‘기회’라는 말이 어쩌다 오는 좋은 순간이라면, ‘때’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알맞은 시간일 것이다. 나의 때는 언제일까? 또는 언제였던 것일까?
입춘도 지나고 이제 곧 우수 지나 봄이 오면, 꽃들은 순차적으로 피고 또 지리라. 세상의 피고지는 초목군상들은 타고난 본성으로 자기의 때를 안다. 그 때를 위하여 오래 준비하고 자신을 가다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람은 본래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의식은 헐거워져서 그 ‘때’라는 것을 넘겨 버리기 일쑤다.
자연은 우리 삶에 물을 주는 위대한 방관자다. 내가 심은 청매 홍매에 물을 주지 않았어도 그것들은 제 본래의 모습대로 꽃 피우고 향기를 퍼뜨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리라. 삶이 아무리 춥고 힘겨울지라도 꽃 피우는 일은 나의 몫인 것을.
남의 ‘때’에 기웃거릴 필요도 까닭도 없다. 나에게는 나의 ‘때’가 있는 것. 나의 ‘때’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매화에게 배운다. 바람 부는 날, 파도치는 날은 잠시 몸을 여몄더라도……, 이제 내가 그대가 꽃필 차례인가 보다.
박윤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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