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39 호

시가 있는 창 23 - 봄날은 또 다시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쌩,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 고영민 「앵두」 전문


 

 

 


봄이 오려하면 몸이 아프다. 날이 조금씩 풀리면 따뜻한 햇볕에 이끌려 마당에 나가본다. 적막하던 마당의 흙 위로 생각도 못했던 발간 것들이 뾰족뾰족 올라오는 것을 보면 마치 발바닥이 뜨거운 창에 찔리기라도 하는 듯 마음이 움찔거려진다. 마당을 가로질러 양지바른 계단에 앉는다. 평상시엔 거침없이 함부로 큰 걸음을 걷다가도 아프면 살금살금 땅을 보며 걷는다. 그러다 어느 날이면 무심하던 앵두나무가지에서 아기의 첫니 같은 앵두꽃이 하나 둘 돋아나 뽀시락뽀시락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기 볼에 묻은 쌀튀밥처럼 가엽게 피어나는 앵두꽃. 비슷한 생김새의 벚꽃이나 사과꽃은 꽃잎이 매끈하지만 앵두꽃은 꽃잎이 구겨진 채로 애처롭게 피었다가 그렇게 또 하늘하늘 떨어진다. 그럴 때면 문득 내가 아픈 이유가 생각난다. 저렇게 싹들이 돋아날라고, 저렇게 앵두꽃이 피어날라고 그래서 나도 아픈 거구나……

 

연극 무대의 조명이 켜지듯 갑자기 환하게 기억나는 날도 있다. 큰 대로를 뒤에 두고 골목을 조금 들어가면 앵두나무가 있는 그 집이 있었다. 딱히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고,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집이라 좀 허술하긴 해도 한 달에 두어 번 친구들과 모이는 집이 있었다. 우리는 새뜻하게 치마를 입었던가. 저마다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우고 그 집 담 너머 빨갛게 익은 앵두를 따먹었다. 주인 없는 집 마당에 들어가서 앵두를 한 움큼씩 따며 재잘거렸다. 그 집에서 지금은 소식을 모르는, 하동에 차밭이 있는 옥이 가져온 녹차도, 연꽃차도 고운 상보를 펼쳐놓고 함께했다. 허물없이 정담도 나누고 다른 이의 흉도 살짝 보고, 아무 경계심 없이 웃고 수다를 떨다가 같이 써온 글도 나누었다. 다음에 올 땐 오늘 따먹은 앵두를 제목으로 글을 써 오자고도 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어느 날, 누가 고영민의 「앵두」란 시를 가져왔다. 그 시를 읽고 우리는 그만 기가 팍 죽어서, 이렇게 글을 써야 되는데, 당장 눈앞에 도발적인 새빨간 앵두알이 튀어나오는 이런 글을 써야 되는데 하다가 벌렁 드러누워서 잠시 말을 잊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또 누군가 그날 따간 앵두로 조그만 유리병에 앵두술을 담았다는 얘기를 나누며 평화로운 한담을 재잘거렸다.

 

새 달력을 넘겨보면 1월이 있고, 2월 3,4,5월이 있고, 12달이 새로 주어짐이 감사하다. 작년 연말에는 느끼지 못했던 희망 같은 게 뭉클거린다. 또 봄이 오리라, 또 앵두꽃이 피고 앵두를 따먹는 날도 틀림없이 또 오리라……


전명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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