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30 호

시가 있는 창 <15> 햇살 한 줌의 소통

세상 끝까지 떠돌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마침내 침상조차 등에 겨워졌을 때
못 가본 길들이 남은 한이 되었다
넘고 넘겨온 고비들이 열사(熱沙)였으므로
젊은 날의 소망이란 끝끝내 무거운
모래주머닐 매단 풍선이었을까,
오랫동안 부풀려온 바람이라면
허공에도 질긴 뿌리가 벋는다는 것,
가본 세상이거나 못 가본 어느 입구에서
머뭇거리다 내다 버린 그리움들 쌓여갔지만
가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저 나뭇잎들
세계의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손짓한다는 것을
그는, 수척한 침상 너머로 비로소 바라본다
창밖에는 다음 세상으로 굴러가려고
황금수레들이 오래오래 환한 여장을 꾸리고 있었다
        김명인 〈황금수레〉 전문

 

 

 

 

멀리에서 온 소포꾸러미를 뜯는다. 끈을 풀자 무릎으로 흘러내린 작은 그림엽서. 하이얀 돛이다. 바람이 불어온다.


책상 앞에 붙여 놓은 엽서를 볼 때마다 몸이 뒤틀리며 꾸룩꾸꾸 소리가 났다. 꼬끼오. 알이라도 낳을 기세다. 사무실 불빛 아래 지친 몸이 슬슬 반란을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좋은 햇살이 다 스러지기 전 여행가방을 꾸려야겠다. 마음이 급해진다.


하나 둘 늘어가는 크고 작은 여행가방들. 가방을 열어 숨은 지폐를 찾아낸다. 여행을 마치고 올 때마다 나는 가방 어딘가에 비상금처럼 남은 여행경비를 갈라 숨겨놓곤 한다. 어느 날 다시 여행가방을 꾸리다가 새삼 찾은 여윳돈은 여행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 일종의 돛인 셈이다.


잡은 계획이 일에 밀려 차일피일 미루어지자 성질 급한 마음이 다짜고짜 박차고 길을 나섰다. 햇살 아래 서자 마른 논에 물이 들 듯 메마른 마음 가득  피잉 눈물이 돈다.


마냥 푸르를 것만 같은 나날도 짧은 봄햇살처럼 우리네 곁에 오래 머물지 않듯, 우리네 생도 마냥 푸르름으로만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압박처럼 발길을 내몬다. 잘 살고 있는가 하는 반문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의 반문으로 돌아오는 여행길.


저녁노을을 보며 삶의 혜안이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돌아야만 찾아지는 고단한 마음의 발걸음을 접고 앉아 지나온 길을 살펴보는 여유를 가지게 되는 시간은 언제 찾아들까.


비로소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방 속 숨겨놓은 비상금처럼 곳곳에 숨겨진 삶의 보너스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너무 늦은 때에 도착하지 않기를, 깨닫고 후회하지 말기를. 지금 바람이 고작 햇살 한 줌의 소통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진 명 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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