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너를 식목한 날은
마음이 온종일 유리병처럼 반짝거린다
이 세상 가장 뒤쪽은 어디인가
나는 아무도 꺼내볼 수 없는 뒤쪽에 너를 심는다
너는 때로 보석이었다가 때로 넝마이었다가
때론 석영이었다가 때론 진흙이었다가,
너는 나의 안이고 바깥이었다가
나의 영원이고 수유였다가,
내를 건너다 문득 생각나는 이름처럼
내를 건너면 홀연 잊어버리는 이름처럼
너를 심고 너를 꽃피울 내 깊은 어느 곳
오늘은 어떤 삽날도 닿지 못할 깊은 뒤쪽에
형언의 삽으로 너를 심나니
이기철 시 〈너의 식목〉 전문

마치 누군가 병뚜껑을 비틀어 여는 것처럼 굳었던 가지에서 모란 이파리들이 스르륵 풀려나오는 중이다. 얼었던 땅 위로 화살촉 같은 빨간 작약 촉이 쪼삣쪼삣 돋아나는 중이다. 뒷산에서 내려온 노루의 발바닥이 작약촉을 밟는다면 내일은 온 산에 핏자국이 붉은 진달래로 피어나겠다. 벌써 산수유꽃이 꿈속같이 어른어른 어우러지고 매화는 하얗게 사태졌으니 꽃샘추위가 아무리 시샘을 해도 영락없이 봄이 왔다.
약속한 적 없건만 하나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 말간 얼굴을 내미는 쇠별꽃 봄까치꽃 생강꽃 오랑캐꽃들. 제비꽃은 제가 피어남으로써 봄날의 들녘에 미치는 영향을 알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제 할 일을 기어이 하고야 마는, 어김없는 자연의 그 고집으로 우주의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간다.
버려지지 않는 카페가 있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서로 즐거워 들락거리던 인터넷 상의 공간이다. 그러다 몇 년 전 몇몇이 뜻을 달리한다고 남은 사람들끼리 다른 카페를 만들어 옮겨갔다. 그런데도 나는 외로울 때 한 번씩 그 카페에 들어가서 인사를 건넨다. 잘들 살고 있느냐, 3월이 왔다, 나도 잘 살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지만 그때 다정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곳을 혼자 거닐다 대답 없는 인사를 남기고 나오곤 한다.
내가 알던 사람 모두 한 때는 내 가슴 속에 식목되었던 사람들, 한 번 식목된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들의 가슴 뒤쪽에도 내가 심어져 있을까. 한 번씩 그 나뭇가지에서 잎이 돋고 꽃이 필 때가 있을까. 그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데, 내 가슴 속에서 그이들이 봄꽃처럼 한 번씩 피는 줄 알기나 할까……
전 명 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