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25 호

길 위에서

시가 있는 창 <9>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의 감옥에서 쓴 시, 〈진정한 여행〉

 

 


길을 가다가 문득, 길 위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나무들이 제 잎을 빠르게 물들여 가고 있다. 부드러운 연두에서 상큼한 초록을 거쳐 더운 햇살을 지나더니, 이제 제 붉은 마음을 하나 둘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곧 겨울이 찾아오리라. 빈 껍질만으로도 당당히 겨울바람에 맞서게 되리라. 나무가 그리 겨울을 견디는 까닭은 그 안에 꿈이 있기 때문이리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가야할 길을 본다. 나는 먼 인생의 길 위에서 어느 지점에 다다른 것일까. 내게도 가슴 깊은 곳, 지워지지 않을 꿈이 있었던가. 그동안 내가 부른 노래는 그대 마음에 어떤 흔적으로 남았을까. 가파른 길 위에서 나는 다른 평탄의 길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조금씩 비워지고 메말라가는 나의 열정이여. 기억에도 가물거리기만 하는 내 살아감의 순수여. 젊은 날 나를 절망하게 했던, 또는 분노하게 했던 지상의 모든 관념들이 바람에 밀려 저만치, 나보다 앞서 달려가고 있다.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분노하고 다시 절망할 수 있을까. 아직 찾아내지 못한 별을 위해 뜨겁게 노래할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나야겠다. 천년 세월에 허물어져 버린 성벽, 그 주위를 까마귀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리는 곳, 검은 피부의 사내가 하늘을 우러러 처절한 삶조차 경배하는 곳, 괜한 아이들의 웃음이 넘쳐나는 곳……. 내가 길을 걷다가 잠시 기우뚱거려도 아무도 내게 관심두지 않으리. 걷는 곳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리라. 그게 좀 슬픈 풍경이라든지 어떤 가난한 풍경이면 어떠리. 나는 어느 계단에서 무거운 배낭에 기대 잠시 눈을 붙여도 좋으리니. 어둠 속에서 별을 바라보며 걷다가 나는 길을 잃어도 좋겠다. 애초 내게는 없던 길이었으니 그 잃어버림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긴 여행을 끝내고 내 삶의 지점으로 돌아올 때쯤, 내게도 연두의 여린 잎들이 움트고 있을까. 나는 욕심내지 않고 나의 길을 경배할 수 있을까.


박 윤 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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