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
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를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이기철 〈가을이라는 물질〉 전문

남으로 난 창에서 내다보면 햇빛의 각도가 가장 아름답게 기울어질 때가 가을이다. 하늘은 새파랗게 높고 공기는 맑고 그늘은 더욱 선명하게 서늘하고, 내 시간은 처음인 듯 느리게 태양을 따라간다. 태양은 비스듬해져 늘 어둑한 실내의 깊숙한 곳까지 밝은 눈길을 골고루 나눠주고, 내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이 역광으로 빛난다. 평범했던 풍경들은 역광을 받을 때 몹시도 아름답다.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든 이파리 위에서나 빈가지 위에서나, 태양은 보석가루처럼 반짝인다. 단풍든 나무이파리가 반투명 색색의 광채로 빛나는 모습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의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풍경을 깊이 들이마신다. 격렬했던 여름날의 갈증이 서서히 진정되어지는 계절 가을. 탕약을 끓이는 듯한 여름날의 갈증은 이런 서늘하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결핍 때문이리라. 이것도 사람에게 충족되어야 할 영혼의 욕망 중 하나다.
길가에 선 벚나무들의 물든 잎들이 하나 둘씩 떨어진다. 저 꽃나무는 나무 전체가 꽃으로 활짝 피어날 그때가 절정이었을 테지. 꽃나무는 한 해에 한 번씩 그렇게 필사적일 때가 있는 것으로 삶의 한 숨통을 트는 것일 게다.
구월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지면 내 앞의 이 햇빛에서도 시간의 독기가 차츰 빠져나가고 가슴 깊은 곳엔 서늘한 물길이 흘러, 나는 저 깊은 겨울의 계단을 내려갈 힘이 생기겠다. 이 아슬아슬한 육체에 담긴 영혼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아 있다는 아픔을 이윽고 이해해서, 변치 않고 빛나는 어떤 광물질의 시를 쓸 수 있겠다.
전 명 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