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17 호

시가 있는 창 <2>


공손하게 봄을 맞다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짓지 않은 적이 있다
           
                       유홍준 <오므린 것들> 전문

 

 

 

아직 응달은 춥다. 보일러 도는 소리에 마음이 움찔거려서, 긴 겨울 내내 뜨뜻하게 보일러를 돌리지 못하고 옷을 최대한 껴입고 추워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연료비 걱정만은 아니었다. 뭐든 맘껏 펑펑 쓴다는 건 왠지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뭔가를 빼앗는 거 같아서, 지구를 낭비하고 삶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내가 편할 땐 나도 모르게 꼭 무언가 죄짓는 기분이 든다.


이 땅 위에 공벌레처럼 그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구둣발이 지나가기를 천둥이 지나가기를 불운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가난한 삶들이 있다. 오므린다는 것, 아무것도 함부로 탐하지 않는 자세. 남에게 상처를 전혀 주지 않는, 그저 참고 인내하는 자세이기에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롭다. 기다리는 것은 늘 더디 온다는 걸 알면서도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것의 다른 말. 오므린다는 말. 간직하는 마음, 수긍하는 마음, 겸손의 마음이다. 내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며 그러면서 뭔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생명을 받아 사랑을 받아 격려를 받아 기도를 받아, 때가 되면 소중한 그것을 내어드릴 자세이다.


세상에 무엇 하나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있었던가. 땅위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또 조심스런 마음으로 한해 분의 겨울을 나고 있다. 삶이 아직은 가시 돋친 겨울 난달이어도 유순한 마음으로 사는 착한 것들에게 봄이여 오라. 공손하게 엎드려 햇빛을 받는 땅은 따뜻해질 것이다. 어린 싹들은 공손하게 두 손바닥을 내밀어 봄비를 맞으며 흙 위로 돋아날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바람에 오므리고 있던 꽃봉오리는 수줍게 벌어질 것이다. 순정한 달빛을 받아 나무들은 자랄 것이다.


벌어지기 전에, 피어나기 전에, 태어나기 전에 오므린 자세가 있었다. 공손의 자세가 있었다.


공손하게 그저 공손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봄, 봄날.  


전명숙 (시인)


※ 필자 약력
1999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염소좌 아래 잠들다》, 《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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