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규(시인)
늙어지면 주문진으로 돌아가리
백두대간 산들바람 선들선들 불어오다
쇠부랑바위 곰피처럼 너울거리는
갯바위 너머 선창에서 쓴 소주 한 잔
(줄임)
내 친구들과 고스톱 판 두들기고
상수리나무가지 꺾는 폭설에 놀라버린
흰 긴 수염고래 내 주소 몰라도 좋으니
월동추 싹 내는 봄 하늬바람 불면
밤마다 몽환의 빛 환한 달덩이 매달아
향호 주변 해당화가시로 시를 새기고
마른 잎사귀 검푸른 바다로 날려 보내리
행복하여라 내 감성의 문전에도
오대양 스며들어 푸릇푸릇할 것이니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에서 늙어 죽으리
이윤길, 〈흰 긴 수염의 노래〉 중에서

그리운 날, 바다는 약속의 땅이 된다. 상처나고 찢긴 마음을 안아주는 치유의 바다. 너는 이렇게 살아라, 네가 믿고 살았던 생의 진실이 돌아서서 너를 아프게 할 때 이렇게 견뎌야 한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던 말을 바다는 내게 일러준다. 내 앞으로 짓쳐오면서 끝없이 내게 말을 걸고, 끝없이 나를 다그친다. 거대한 벽 앞에 주저앉은 나의 유순柔順을 다그친다.
달이 둥싯 떠오르면 흰 긴수염고래는 초원을 가는 거친 바람의 노래를 부르리라. 그 마을에서 나는 내 오랜 그리움을 내려놓아야 하리. 살아도 살아도 아픈 사람의 일에 마음 두지 않아야 하리. 바다를 앞에 두고 시 한편 쓰는 일은 파도 한 차례 물러갔다 다시 오는 것처럼 그저 그래야 하리. 한 줄의 시가 그 누군가의 가슴을 적셔주지 못할지라도 그것마저 견뎌야 하리. 그 밤에, 달빛은 거친 바다를 지나 내게로 오리.
어느 겨울 폭설이 내려 사람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끊겨도 좋으리. 밤마다 간간이 울어대던 산짐승조차 그들 거처에 머무르고,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지워져 버린, 적어도 대여섯 날쯤은 새하얀 바다의 한쪽 귀퉁이에 나는 살게 되리라. 아주 천천히, 그렇게 사랑은 흘러갈 것을.
바다의 중심을 향해 작은 돌 하나 날려보낸다. 돌 하나 날려 보내는 것은 저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나의 욕심이다. 마음에 큰 바다를 가지고 살고 싶다.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바다. 비린 갯내음은 내 살아온 날의 비릿한 흔적이라고 생각하리. 바닷바람에 머리를 적시면 오래된 이 두근거림은 가라앉을까.
생각하면 절망과 희망은 하나인 것을. 밀려오는 파도가 희망으로 갯돌을 밀쳐오면, 같은 물살로 절망이 그것을 다시 쓸어가는 것을. 견디다 견디다 하면서 갯돌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그렇게 조금씩 나를 풀어내다 보면 내 몸이 언젠가는 가벼워지리.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내 감성은 쉽게 흔들리리. 꿈꾸다 만 것 같은 나의 삶도 바다 앞에 서면 잠시 부끄럽지 않으리.
이번 호부터 ‘시가 있는 창’란은 세 분의 시인이 번갈아 집필합니다. 우리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박윤규, 전명숙, 진명주 시인을 필진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세 분 시인의 감성으로 풀어내는 시의 세계는 독자 여러분을 아름다운 삶의 향기에 들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