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14 호

詩의 풍경 <33> 안부

진명주 (시인)

 

 

 

집이든 가구든
오래된 것을 보면 가만히 만져보는 버릇이 있다
골목 어디선가 불쑥 튀어 나오는 천리향
가슴 언저리 어디서 지극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오래된 몸에 손을 대는 것이다
오래된 집에 손을 대어 보면
구멍 속 어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 새의 날개 소리도 들리고
금이 간 담장 위 꼬물꼬물 뿌리 내리는
여린 풀들의 용쓰는 소리도 들린다
장독대 옆 깨진 단지 조각 몇 개가
백일홍꽃을 품고 있다
저 꽃은 선대부터 피고 지며
오래된 집의 내력을 지켜봤을 것이다
(줄임)
나이테가 지문처럼 닳아 반들거리는
낡은 문을 밀어본다
어머니처럼 가만히 늙어 가는 집이 있다
          
   졸시, 〈오래된 몸〉 부분

 

 

수첩을 정리하는 것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수첩을 구해 소중한 지인들의 연락처를 옮겨 적는 시간은 좋은 인연들에 대한 감사와 소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간이 사라졌다. 더 이상 전화번호 수첩이 필요치 않게 된 편리한 세상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앗아가 버렸다.


핸드폰을 잃어버리고서야 아차 했다. 잃은 폰이야 새로 사면 그만이지만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소중한 이들의 연락처를 잃었다는 게 무엇보다 커다란 낭패였다. 시간이 흘러 연락처는 핸드폰을 잃기 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지만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은 그대로 시간 속에 머물게 되었다.


집이든 가구든 낡고 오래된 것을 대하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움이 있다. 누군가 살고, 누군가 만졌던 시간을 품은 것들. 그래서 낡고 오래된 것들 앞에 서면 무수한 시간 속 깃든 사연들이 손바닥을 타고 내게로 전달되어 올 것 같아 손을 댄 채 가만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연도 별로 채곡채곡 정리된 낡은 수첩들. 몇 번을 버리려다가 그래도 추억인데, 세월의 흔적으로 남겨도 좋지 않을까 싶어 도로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다. 수첩을 가만히 만져본다.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오래 잊고 지내던 이름들이 있다. 까무룩 잊었던 사람들이 그리움의 턱을 고인 채 머물러 있다. 해가 가기 전 안부를 전하라는 듯, 옛집 문패를 쓰다듬듯 그리운 이름들을 꼭꼭 눌러 손편지라도 쓰라는 듯, 가는 이 해가 나에게 준 선물처럼 그렇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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