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213 호

詩의 풍경 <31> 통증

진명주(시인)

 

 

봄부터 가을까지 아프지 않고 왔다
가을이 계절의 상부에 속한다면 몸은 지금 늪지를 조성하고 있다.
햇살, 비바람, 천둥 번개가 온몸에 박혀 열꽃 연꽃 피우려 한다.
꽃은 이만큼 먼 길을 와서 핀다.

약 먹은 몸이 나를 어두운 곳으로 이끈다.
며칠 땅 속에 푹 파묻히고 나면
꽃이질 거라고 나를 몸의 거름이 되라 한다.
여름내 땀방울 빠져나간 물관이 메말라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흐드러지게 단풍든 몸은 나를 허무는 가시
먼 곳을 건너온 잎을 버리라 한다.
해가 나뭇잎처럼 떨어져 어두워올 무렵
몸이 깜깜한 늪지를 빠져나온다.
열꽃 연꽃 피우던 가시가 땀방울로 녹아내린다.
활활 타오르던 몸 안쪽 붉은 잎을 불러내는 일
꽃이 핀 몸을 벗고 앙상한 목숨하나 남겨두는 일

내가 여러 곳 여러 날을 살았던 일은 겉옷 같은 꽃잎이었다.

박춘석 〈가을 몸살〉 전문

 

 

발가락이 부었다. 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베란다로 나가려다 문틀에 쿵 발가락을 찍은 것이다. 눈앞이 아찔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세상은 여전했고 아무도 내 아픔을 눈치 챈 이는 없었다. 뼈에 이상이 있다면 아예 걷지 못하리라, 절룩이며 며칠을 보냈다.


사람이 왜 그리 미련하니. 지청구를 듣고서야 찾은 병원. 의사는 뼈에는 이상 없다, 발가락에 냉찜질을 하란다. 주사도 약도 없다. 돌아오면서 몇 장 찍은 X-레이 사진도 아깝고 이까짓 일로 뒷북치며 부산떤 게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보이지 않고 속으로 조여드는 아픔이 있었을까? 병원 옆 굵은 나무 하나가 밑동만 남기고 뎅강 잘렸다. 한때 날 것들의 쉼터가 되고 지친 이들에게 그늘막이 되었던 나무. 아름드리 덩치에 무성한 잎사귀를 자랑하던 나무에 무슨 아픔이 저다지도 깊이 들었던 것일까?


살아오며 크고 작은 아픔들이 마음에 몸에 열꽃 피게 할 때가 있다. 그 아픔들을 참아내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스릴 때가 있다. 그러나 때를 놓쳐 저 나무처럼 참다가참다가 도저히 감당 안 될 때 저처럼 제 몸으로 그 아픔을 뱉어내면 어쩌나.


몸이 잘린 나무는 제 안의 생각이나 고통을 다 내려놓았을까? 잘린 밑동이 바람에 말라가고 있다. 바람에 말라가면 아픔을 잊는 걸까? 늦가을 추적추적 비를 몰고 오는 몸살처럼 나무 밑동의 고통이 내게 다가온다. 가열차게 당당하게 몸집 부풀린 크고 작은 상처들이 열꽃 피운 자리. 시간 지나면 그 곳에 회한처럼 연민처럼 화엄의 꽃은 피는 것일까?


꽃 진 자리 밑동만 남은 나무를 만진다. 새삼 내 아픔을 내가 어루만지는 듯 마음이 뜨겁다. 애썼다. 등 두드려준다. 제 몸인 주인을 닮은 듯 미련하게 부어 올라있는 새끼발가락.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삶을 이어가는 한 방법이기라도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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