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187 호

詩의 풍경 <6> 가을 문안

 

 

 

진명주(시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가을햇살은 바라보기만 해도 아까운 마음이 드는지 집집마다 두꺼운 이불이 내걸립니다. 휘어청, 빨래건조대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굽어지네요. 옆에 든 과일바구니에도 햇살이 하나 가득 올라탑니다.
골목 어귀 능소화는 여름내 매달던 꽃을 모두 떨구고 잎사귀만 남아 새파랗게 물이 올라 있습니다. 친구는 파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부재중입니다. 있는 찬에 숟가락만 올리면 될 일을, 잠시 후 무거운 장바구니와 함께 나타나겠지요.
집주인의 부재를 감추는 듯 대문 옆 커다란 잎사귀의 해바라기, 눈을 부라리며 어디 들어서냐고 으름장입니다. 정작 몸이 날랜 사고뭉치 누렁이는 집지킴이 제 역할은 안중에 없이 평상 아래 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움찔움찔 작은 몸을 뒤척입니다.
실팍하게 살이 오른 늙은 호박들이 단단히 제 몸을 굳힌 채 절구 위에 쌓여 있네요. 머지않아 이 곳을 찾은 이들이 돌아설 땐 그들 팔에 하나씩 얹혀 있겠지요. 아득히 물오리떼가 날아오르고 강물에는 햇살이 뜨거운 제 낯을 식힐 겸 뛰어들고 있습니다.
오늘 딱히 일없이 햇살을 핑계로 나선 것이 정작 친구의 안부보다 손맛 깊은 밥상을 받고 싶어서인 것을 이미 눈치 챘나봅니다. 평상에 올려진 정성스레 차려진 밥상을 받노라면 내 삶이 정갈한 찬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모습으로 다가서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지요.
친구를 기다리며 수돗가에 앉아 햇살 가득한 과일을 씻습니다. 등 뒤에서 종소리처럼 낮고 길게 괘종시계가 울립니다. 길을 가다가 저녁 종소리가 들리거든 자신을 사랑하는 세 사람을 생각하라 했나요. 혼자 사는 친구는 수돗가에 앉아 시간마다 울릴 저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평상에 씻은 과일을 옮겨놓고 젖은 손을 탈탈 털며 대문 밖을 내다봅니다. 저 아래 환한 웃음처럼 깜박이를 넣고 다가오는 불빛. 나도 따라 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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