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비가 오니 마중 나오라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우산을 하나 더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밤이 되니 빗줄기가 더 세차고 바람까지 불어댄다. 빗속을 걸으면서 지하철까지 걸어가는 길이 내게는 더할 수 없는 추억으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남편의 마중을 나가는 일은 실로 오랜만이다. 빗속에서 나는 잠시 그 추억의 파편들을 모아본다. 20년이 넘은 세월 속에서 빛바랜 사진처럼 그렇게 박혀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넘겨본다.
결혼 초, 맞선을 보고 한달 반 만에 결혼을 했으니 곧바로 행복한 연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 천 번도 더 보고 싶을 정도였고 매일매일 편지 쓰듯 일기를 적으며 그 흔적을 남기곤 했다. 누가 내 행복을 시샘해 뺏어갈까 봐 두렵기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 날은 남편이 멀리 삼천포까지 외근을 가는 날이었다. 일곱 시에 부산 도착한다는 남편의 전갈을 받고 나는 이른 저녁을 먹고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남편 마중을 나갔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놀을 친구삼아 남편에게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부산 사상은 낯선 길이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내 인생의 첫 시발점이어서 그런지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리는 남편과 손을 잡고 걸어오던 길은 아직도 눈에 선히 밟힌다. 아름다운 그림 한 점 보다도 더 오래 내 기억 속에 꽂혀 있다. 남편만이 내 세상이었고 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이었다.
평생 그런 느낌으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삶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살아갈수록 연애감정은 옅어지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하나 둘 애써 그려놓은 그림마저 퇴색되어 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하나씩 끄집어내어 다듬고 추억하며 사는 것 또한 결혼의 또 다른 맛이 아니던가!
지하철에 먼저 도착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으니 저 멀리부터 광채가 나는 한 사람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남편이다. 내심 반가우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는 남편의 얼굴에도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져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버스나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조금은 유치한 짓도 과감히 하는 용기도 생기나 보다. 버스 제일 뒤 칸에 자리를 잡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해운대를 갈 만큼 여유로운 사람으로 변해갔다. 급속하게 변해가는 ‘디지털 시대’에 느린 풍경으로 그려지는 ‘아날로그’로 사는 것도 색다른 맛이 아닌가 싶어진다.
건강하게 살려면 애써 힘들게 살라던 어느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너무 편하게 살다보면 끝도 없이 편해지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이다. 늦게나마 이렇게 사는 방법을 찾은 남편이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오늘 남편과 빗속의 데이트는 잠시 나를 신혼으로 되돌려주었다. 비록 20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그려지는 것은 지금도 돌아가고 싶은 풍경으로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이 다 변했어도 처음 그 느낌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 ‘촉매제’가 될 테니 말이다.

박 태 남
(덕포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