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소식지 : 179 호

詩가 있는 窓 118 - 그 붉고 따스한

 

 

 

                                                                                        박윤규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 보고 걸었다
             이시영 詩, 〈바람이 불면〉 전문

 

            

 

                                         

강철같은 한파 속에 선인장이 꽃을 피웁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그 잠깐 사이 몸은 꽁꽁 얼어버렸는데요. 유리창은 하얀 성에로 두꺼운 옷을 입었구요. 그런데 세상에, 그 찬바람 휭휭 들어오는 베란다에 버리듯 놓아둔 선인장이 꽃을 피웁니다.
매서운 추위는 거리를 텅 비우지요. 느즈막히 지나는 사람들끼리는 괜히 동질의 마음이 생겨 눈 마주치면 아는 체라도 하고 싶어지지요. ‘그렇죠? 사는 게 참 힘들죠?’ 그런데 이 추운 저녁에는 사람들마다 목을 푹 잠그고는 아무 데도 눈길 주지 않습니다. 거리에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있는 둥 마는 둥…… 그런 셈이지요.
세상을 좀 살다 보니 세상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어두워집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전에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하고 억지로 없는 활개를 펴기도 했지만요. 이제는 수그리는 것만 익숙해졌지 뭡니까. 바람에, 추위에, 세상 눈들에, 그리고 내 안의 어둠에까지 말입니다.
꽃을 피운 선인장을 만져 봅니다. 따뜻함이 전해 옵니다. 참 철없는 놈이라고, 말하고 나니 눈물이 나려 합니다. 괜히. 그렇다고 그놈을 따뜻한 거실로 옮겨올 마음은 나지 않습니다. 그래라, 너는 너대로 호기롭게 살아라. 거실로 들어와 앉았는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따갑습니다. 일어섰다 앉았다, 나는 또 그러고 있습니다. 괜히.
함께 모여 자유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괜한 울분으로 술에 벌건 낯이 되어 가지고 거리를 어디까지 혼자 걸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많이 비틀거렸을 겁니다마는. 자유보다는 사랑 때문에 비틀거렸던 적이 더 있었던가? 어쨌거나, 지금의 내 몸은 그 ‘비틀거림’마저 허용치 않습니다. 그런 기억마저 허접한 것이라 치부하고 만 때문이겠죠.
그 바보같던 친구들의 눈동자가 오늘 많이 그립습니다. 나처럼이 아니고, 모두들 그때의 기억을 보물처럼 가슴 한켠에 소중히 심어 있을 거라 믿어 봅니다. 그래서 더 추워진 날에 저 바보같은 선인장처럼 붉고 따스한 꽃 피워 올리겠지요.
구십 몇년만의 한파라네요. 온 나라 곳곳이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로 난리를 치는데, 새해의 희망은 벌써 어디로 가고…… 그간 모두들 평안하신지요?
눈물은 사람을 많이 나약하게 만들기는 하는데요, 그래도 눈물이 있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거 아닌가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우리는 너무 똑바로 걷고 있나 봅니다. 세상에 눈물이 많이 말라 버려서, 다음 겨울은 더 혹독하리라 생각됩니다만.
어둠이 와도 어둠에 젖지 않고 푸른 가시잎을 꼿꼿이 세웠던 친구들. 한 놈이라도 연락이 닿으면 술 한잔 나누고 싶어집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나서고 싶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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