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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규
너는 나에게 잊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랑이란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랑이 사라질 때는 절망의 푸른 알 하나 가슴에 낳는다 너를 보내고 난 뒤 내 가슴에 뚜렷이 떠오른 통증 하나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그것 때문에 바람은 밤새 포플러 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다 졸시, 「사랑이란」 전문
새해가 되어 달력을 다시 걸었다. 한 달을 시작한다는 것,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 시작의 의미는 무얼까? 시간은 여지없이 일직선상을 그림자도 없이 내달리는 것. 그 내달림에 과거가 어디 있으며 현재가, 또 미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생각은 어디까지가 추억이고 또 어디서부터 희망일 것인가. 새로움은 어떤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인가. 사랑도 그런 것이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내가 너를 사랑하였으며, 그 사랑의 기억이 언제부터 별빛처럼 잘게 부서져 흩날렸던가. 너는 내게 없는 것인가. 형체도 없어지고 내게 주던 그 웃음도 사라지고…… 지난 가을날 우리가 함께 앉았던 그 자리마저 지워져 갔다는 것인가. 그러나 말이다. 그것이, 그 흐른 시간들이 어찌 막막한 허공이겠느냐. 아직도 사라진 너의 웃음은 나를 흔들고 귀에는 네 목소리 쟁쟁한 것을. 길을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 우리에게 그것은 이미 지난 시간들이라고? 천만에! 아픈 이별은 아무리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추억이 될 수 없는 것. 그것은 현실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여름의 강풍에 가지를 부러뜨린 나무가 제아무리 새움을 틔우고 새 가지를 쭉쭉 뻗는다 하여도 그 부러진 가지의 기억을 재우겠느냐. 죽어도 버리지 못할, 운명처럼, 제 몸에 마음에 무거운 옹이로 남아지는 것이다. 차라리 몸의 상처는 마음의 상처보다 덜할 수도 있겠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깊은 혼돈에 빠져 있다. 너를 보내고 난 뒤,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병증에 시달리고 있다.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병증! 시를 쓰는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저것 봐, 포플러 나무 가지에 걸려 제 길을 잃어버린 바람 말이다. 이 깊은 밤, 오도가도 못하는 바람의 아슬한 울음소리 듣는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사랑을 잃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낮고도 긴 울음. 다시 달력을 본다. 새로 걸은 달력에는 가지마다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 나무 아래, 흰 눈 위로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 뚜렷하다. 내게로 걸어오는 발자국이 아니라, 내게서 떠나가는 발자국이다. 하필이면! 그리고 내가 밟아가야 할 많은 날들……. 새살이 돋듯 희미하게 아침이 돋는다. 살아간다는 일은 언제나 적막강산이다. 사랑했던 기억은 아무리 품으려 해도 흐려지게 마련이지만, 나는 또 어떤 새로움으로 아침을 시작해야 하겠느냐. ■시인■ |